책발췌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우치다 타츠루 저/ 이경덕 옮김

책속의지혜 2018. 1. 13. 20:19

 

 

사회심리학 현상을 보면 인간은 왜 그토록 자존감을  열망하며 자기자신과 남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며  때로는 완전히 없애버리려 하는지. 죽음의 공포는 인간행동의 기저에  있는  주된 원동력이다.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까란  물음에 답하려 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생활의 본질적 모습에 대해 해명하려  했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비평가와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전문가는 자신을 완벽한 정체성을 가진  우뚝  솟은  만능인으로서  내세우려고 한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니다오히려 대부분  자기  소속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마련이다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사실은  애초부터  우리  시야에  들어올 일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파헤친 게 구조주의다.

 

타인과 구별되는 한 개인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자기가 동일한  주체로 먼저  존재하고, 이 자기동일성을 확보한 주체가  차례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실현을 하는게 아니다.  "관계망 속에  던져진 사람은 거기서 만들어진 의미나 가치에 따라 자신이 누구인지 회고적 형태로 알게 된다. 주체성의 기원은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게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가장 근본 개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크스는 실제로 계급적으로, 프로이트는  실제로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른 채  생각한다고  보았다.

 

야생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은 각각  '자기  보존'이라는  순수하게  이기적  동기로 행동한다. 공리주의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기적 행동을 하고 자기 보존 노력은 인간의  본래 권리, 즉 자연권이라고 생각했다. 홉스는 이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다.

 

자연권  행사가 허용된  사회는 일부  압도적 강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개인이 소기의  자기보존, 자기실현의 욕망을 이룰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일단 자연적 욕구를  단념하고 사회계약에 기초해 창설된  국가에 자연권을 위임하게  된다.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인간이 공동체를 구성하고 하나의 정부에  복종할때 그들이 서로 인정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 목적은 자기들의 사유재산 보전이었다. 법률이나  도덕, 재판,법적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사유재산 확보는 쉽지 않다사람들은 사유권 보전을 위해 사유권  일부 제한을 수용했다. 즉 타인의 것을 힘으로 빼앗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됐다. 이 도덕률은 어디까지나 '사유재산  보전, 개인의 자기보존, 자기실현', '자연권의 최대 행사'를 목적으로 한다선악  규범 그 자체에 어떤 보편적 의미나  인간적  가치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니체의 도덕관은 대중사회의 도덕론이다. 그의 대중사회란 구성원들이 무리(‘짐승의 무리라 명명)를 이루어 오로지 이웃 사람과 똑같이 하는 행동이 우선적으로 배려되는 사회다. 비판이나 회의 없이 전원이 눈사태를 피해 달려가듯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게 대중사회의 특징이다.

 

시민사회의 이기적 시민들이 자연권의 일부의 국가 위임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가장 큰 이익을 얻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최적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한 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의 제한은 이기적 동기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민들에 의해 비로소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짐승의 무리에는 조리있는 추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짐승 무리의 관심은 어떻게 해서 균질적인 무리를 유지할 것인가에 있다.

 

공리주의적 시민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주판을 튕겨서 계산한 결과로서 전원의 결단이 일치했지만 짐승의 무리에서는 전원이 일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짐승의 무리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을 그 행위에 내재하는 가치나 그 행위가 그에게 가져다 줄 이익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과 동일하나 아닌지를 기준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동일하면 선, 다르면 악이 된다. 그것이 이들이 지닌 도덕의 유일한 기준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끼친 구조주의의 견해는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물의 이름은 인간이 제멋대로 붙인 것이다라고 알고 있는 게 우리의 상식이다. 이는 이름이 있기 전부터 사물은 이미 존재했다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진다면 명명되기 이전의 이름을 갖지 못한 사물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소쉬르는 주장한다. 소쉬르는 별자리를 보는 것처럼 원래 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세계에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별자리를 정하듯 정리하는 행위가 언어활동이라 생각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이 붙는 게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다.

 

외국어를 모국어의 어휘에 포함시킴은 그 관념을 낳은 종족의 사상을 채용하는 셈이다. 그 단어의 새로운 의미가 우리 속에 새롭게 등록 된다. 쓰는 어휘는 좀 더 풍요로워지고 우리 세계는 입체감이 생긴다. 모국어에 어떤 단어의 존재 유무는 그 국어를 말하는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경험 사고와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의 경험은 각자 사용하는 언어로 깊이 규정된다. 인간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생리적 현상까지 언어의 틀을 통과하면 그 모습이 달라진다.

 

어떤 사물의 성질이나 의미, 기능은 그 사물이 포함된 관계망, 또는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차후에 결정된다. 사물 자체에 생득적이거나 본질적인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돼 있지 않다고 한다.

 

소쉬르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한 자기가 속한 언어 공동체의 가치관을 승인하고 강화한다고 말한다.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사는 것만으로 우리가 이미 어떤 가치 체계 속에 휘말려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마음속에 있는 어떤 생각은 사실은 언어로 표현됨과 동시에 생긴다. 말을 하고 난 뒤 우리는 자기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안다. 마음속으로 독백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말할 때 말하고 있는 난 엄밀히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습득한 언어 규칙이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며,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전에 읽었던 책의 일부다.

 

내 지론의 주머니에 가장 많이 들어 있는 내용은 타인의 지론이다. 확신있게 내 의견을 타인에게 진술하는 경우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 들은 내용을 되풀이 하는 꼴이다. ‘내가 한 말조차 그것을 구성하는 사실의 대부분이 외부에서 들어 온 내용이라면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어떤 제도가 생성된 순간의 현장, 즉 역사적인 가치판단이 개입해서 그것을 더럽히기 전의 가공 전 상태를 롤랑 바르트는 학술 용어로 영도(零度, degree zero)’라고 했다. 구조주의란 한마디로 인간의 다양한 제도(언어, 문학, 신화, 친족, 무의식 등)에서의 영도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 를 근원적 사고의 원점으로 간주하는 인간주의적 진보사관에  푸코는 이의를 제기했다. 무의식적으로 역사는 지금 여기 를 향해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생각에 익숙하다. 그러나 역사의 직선적 추이는 환상이다. ‘역사를 꿰뚫는 한 가닥 선을 보기 위해 선택된 단 하나의 만 남기고 거기서 벗어난 사건이나 그와 관련 없는 역사적 사실은 배제하고 버린다. 예를 들면, 어떤 조상 하나만을 선택하고 그 외의 조상은 제외해야 조상으로부터 나에게 일직선으로 계승된 민족적 정체성의 환상이 성립한다.

 

세계는 공상과학소설에 등장하는 다원우주론은 인간중심적 진보사관의 반대쪽에 서 있는 생각이므로 푸코의 생각은 이 공상과학소설의 사고와 통한다.

 

역사적 흐름이 다양한 가능성이 배제된 결과가 아닌지 푸코는 의문을 가졌다. 왜 어떤 사건은 선택적으로 억압되고 비밀에 부쳐지고 은폐됐는가? 왜 어떤 사건은 기술되고 어떤 사건은 기술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을 알기 위해 사건이 생성된 역사상의 그 시점사건의 영도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찰해 봐야 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고대의 권력은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동안 점차 그 윤곽이 애매해졌다. 권력이 비권력이 됐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권력은 감촉이 부드러운 이성적인 대리인학술적인 지로 오히려 철저히 행사된다고 푸코는 생각한다. 17세기 이후 인간주의적인 관점이 점차 뿌리를 내리면서 사회에서 광인을 위한 장소가 사라졌다. 세계는 표준적 인간만이 사는 장소가 됐고 거기서 벗어난 사람은 조직적으로 배제됐다.

 

광인은 사법관에 의한 수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에 의한 치료의 대상이 된다. 얼핏 광인의 처우 방법이 보다 합리적

인도적으로 바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단단한 격리로부터 부드러운 격리로의 이행 과정에서 어떤 공범관계가 암묵적으로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의료와 정치의 결탁, 지와 권력의 결탁이다.

 

신체를 표적으로 하는 정치기술의 최종 목적은 단지 신체의 지배만이 아니고 정신 지배에 있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자기의 내발적 욕망에 의해 순종적 신민이 돼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등록토록 만드는데 있다.

 

오랫동안 성은 억제되고 권력적으로 관리됐다. 우리는 그 억압에서 벗어나 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았다고 생각해선 도착적인 성이나 변태, 불륜에 대해 얘기한다.

푸코는 이런 억압으로부터 성의 해방을 외치는 담론들을 사회의 병리징후라고 봤다.

 

성적 억압을 고발하는 담론들은 고발되는 그 제도와 동일한 그물코 속에 있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17세기 전까지 가톨릭 신자는 고해성사를 통해 성생활을 의무적으로 상세히 보고했다애무 방법이나 쾌락의 정확한 순간 등에 대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졌다. 성적 일탈은 오랫동안 자연스럽지 못한 죄로 형사처분의 대상이었지만 19세기에는 치료의 대상이 됐다.

인간의 온갖 성적 행위를 망라한 목록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공화하는 것, ‘기호를 공유하는 마니아들을 조직화하는 것, 매춘부나 포르노그라피를 다루는 성 상품 시장을 세우는 것, 의학이나 정신병리학, 사회학 등을 성에 대한 학문적 지식으로 편성하는 등이 성의 담론화이다.

 

푸코의 권력이라는 말은 국가 권력이라든지, 그것이 조종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실체가 아니라 모든 수준의 인간적 활동을 분류하고, 명명하고, 표준화하여 공공의 문화재로 지의 목록에 등록하려는 축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 권력 비판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권력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실질적으로 열거하고 목록화해서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부여하는 한 그것 자체가 이미 권력으로 변한 것으로 본다.

 

제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의 의심까지도, ‘제도적인 지로 의심받는 그 제도에 속한다는 불쾌감. 이런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을 활기차게 노래하는 우둔한 학자나 지식인에 대한 모멸감. 이런 불쾌한 일들에 조종당하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자기언급이 푸코가 보여준 비평의 핵심이다.

 

우리의 사고나 경험 양식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 많이 의존하기에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사고나 경험 양식도 변한다. 우리가 모국어를 즐겁고 자유롭게 쓰고 있다고 믿을때도 언어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운용된다.

 

바르트는 이 보이지 않는 규칙은 랑그langue스틸style이다. 바르트의 경고는 어떤 집단 고유의 에크리튀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넓은 범위의 어법이 지닌 위험성이다.

 

징후가 없는 언어 사용이 바로 패권을 쥔 어법이다. 그 어법은 그 사회의 객관적 언어 사용이다. , 어떤 주관적 의견이나 개인적 인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개인의 감정이 들어 있지 않는 가치중립적인 언어 사용을 말한다.

 

가치중립적인 어법 속에 그 사회집단 전원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이데올로기가 깃들어 있다고 바르트는 생각했다. 페미니즘 비평 이론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자연적인 어법이란 남성중심주의적인 어법이다. 온갖 기호 조작으로 끊임없이 남성 우월성과 위신을 말하고, 정치권력과 사회적

문화적 자원을 오직 남성 귀속 정당화에 사용하는 언어이다.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고) 쉽게 텍스트를 지배하는 주인공의 견해에 동화된다. <진주만> 영화를보고 미국비행사가 일본기를 추락시키길 바란다. 우리는 확고한 견해를 가진 인간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게 아니다. 텍스트 쪽이 우리를 그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주체로 형성한다.

 

바르트는 작품의 기원에 저자가 있고 그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게 있어 그것을 얘기나 영상, 그림, 음악을 매개로 독자나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단선적인 도식을 부정했다.

 

카피라이트란 개념은 문화적 생산물이 단일한 생산자를 가진다는 전제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저자란 어떤 걸 ’0에서창조한 사람이다. 성서적 전통에 함양된 유럽 문화에서 볼 때 그것은 조물주를 모방한 개념이다. 누군가 무에서 창조를 했고 창조된 것은 조물주의 소유물이란 생각은 자연스럽다.

 

바르트는 저자가 작품을 쓰게 된 계기의 초기 조건을 찾는 일이라는 근대비평의 기본형태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인터넷 텍스트를 읽을 때 원래 누가 만들어 배포한 문제에 흥미가 없다. 인터넷 상에선 복사

전송되고 링크되는 동안 변용과 증식이 이루어져 최초 저자가 누구인지는 무의미해진다. 내가 읽을지 읽지 않을지, 읽은 다음 자기 사이트로 전송 또는 링크할지 등의 판단에 맡겨진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과 비슷한 생각이다.

 

 

인류학의 현지조사를 해 학문적 업적을 쌓은 레베스트로스는 <야생 사고>에서 장 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비판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5년 동안 프랑스 사상계에 군림해온 실존주의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키에르케고르 등의 실존 철학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이론을 접합한 이론이다. ’실존한다(ex-sistere)’바깥에 선다란 의미다. 자기존립의 근거가 자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의 외부에 있다는 게 실존주의 기본 자세다. 실존주의는 역사의 이름으로 모든 걸 재단하는 권력적   자기중심적인 지라고 비판 받았다.

 

실존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실마리로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은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의미다.

 

어떤 영역에 개념이나 어휘가 풍부함은 그 집단이 그 영역에 깊고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문명인과 미개인은 그 관심을 갖는 방법이 다를 뿐, 문명인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다고 미개인은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세계는 사고의 대상, 즉 최소한 다양한 욕구를 채우는 수단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다. 모든 문명은 각자가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기가 보는 세계가 객관적인 실제 세계이며 다른 사람이 보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된 세계라며 깔본다.

 

사르트르는 역사를 궁극적 재판소라고 생각했다. 역사는 미개에서 문명으로, 정체에서 혁명으로 진행되는 단선적 과정 상에서 모든 인간적 삶의 옳고 그름을 판정한다. 사르트르가 역사의 잣대로 역사적으로 옳은 결단을 내리는 인간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멜라네시아 야만인이 그들의 독자적 잣대로 자기들주변 사람들을 구별하는 사실과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임을 레비스트로스는 지적한다.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치료의 거점이 될 수 없다. 정신분석 치료의 발판은 언어의 선택이다. 다시 말하면 대화또는 얘기수준이다. 정신분석 치료는 피분석가가 분석가에게 자기 마음을 말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모든 자기에 대한 얘기가 그렇듯이 피분석자의 얘기는 단편적인 진실을 포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민들어진 얘기에 불과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분석 치료는 무의식적으로 억압돼 있는 환자의 심적과정을 의식화시킴으로써 병의 징후를 소멸시키는 걸 목적으로 한다. ‘의식화언어화이기에 분석 치료는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진정한 자신에 대한 얘기하는것이다.

 

무의식의 방에 갇혀서 냉동보존된 기억을 해동하면 과거 그대로의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기억은 그처럼 확실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늘 생각해내면서 형성되는 과거이다.

 

정신분석적 대화는 피분석자가 정말 체험했던 것정말로 생각했던 것을 찾아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피분석자는 아무리 말해도 그 중심의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없는 구조적인 채워지지 않음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피분석자가 말하고 있는 건 헛소리이다.

피분석자는 전력을 다해 자신을 말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누군가에 대해말하고 있다. 그 누군가는 피분석자가 그것이 자기라고 굳게 믿을수록 단지 그와 비슷해질 뿐이다. ‘증상은 환자 내부에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무엇다른 것으로 모습을 바꾸어 신체의 표층에 노출된 하나의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피분석자가 말하는 억압된 기억또는 하나의 작품이다. 어떤 병적 증상을 보다 경미한 다른 증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실리적으로 볼 때 치료의 성공이라 말할 수 있다.

 

라캉은 피분석자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말할 때 시제는 과거에 실제 있었던 사건을 말하는 단순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그때에 이미 완료한 행위를 나타내는 전미래형나는 저녁까지 일을 마칠거다이다.

 

내가 과거 사건을 생각해내는것은 지금 나의 회상을 귀기울이는 사람이 내가 이런 인간임을 생각해줬으면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즉 타자의 승인을 얻기 위해 과거를 생각해 내는 것이다. 우린 미래를 향해 과거를 생각해 낸다.

 

말할게 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말할 수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리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자아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다. 주체(=피분석가)로서 말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규정, 자기정위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게 하는 동기 부여가 바로 '자아'.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일이다.

 

는 상대가 있는 대화 속에서 나는 oo라는 말투로 자기동일화를 이루는 주체다. ‘는 주체가 전미래형으로 말하는 얘기의 주인공이다. 자아는 주체의 두 간극으르 이루고 있다. 주체는 이 양극를 오가면서 자아의 거리를 가능한 좁히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말을 배우는 아이는 지금 배우고 잇는 모국어가 어떤 규칙을 바탕으로 세계를 분절(=차별화=차이화)하고 있는 지 모른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은 언어 습득뿐만아니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계는 이미 분절돼 있는 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는 절대적으로 수동적 위치에 자기가 처음부터 놓여 있다는 걸 승인하는 것이다.

 

혹부리 영감 동화에서 도깨비는 어떤 차별화가 이뤄진 후에 누군가가 차별화를 실행했는데 그 차별화가 어떤 근거로 행해졌는지 결코 명확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표상하는 것이다. ‘도깨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분절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끝나 있었고 나는 어떤 이유에서 어떤 기준으로 분절이 이뤄졌는지 소급해서 알 수 없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무능을 보여주는 기호.

 

혹부리 영감에 나오는 도깨비가 휘두르는 권력과 공포는 그것이 어떤 기준으로 차별화한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의 지지를 받고 있다. 독재자나 폭군의 권력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독재자에게 공포를 느끼는 건 그가 가진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이 어떤 기준으로 행사할지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하들 중 누가 다음에 총애를 얻을지 사형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을 때 권력자는 참으로 무서운 자가 된다.

 

어처구니없는 지배전략이 가능한 것도 근거 없는 차별을 당할 때 그 실행자를 저항할 수 없는 강한 권력의 소유자라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구조화돼 있기 때문이다. 깡패의 협박이나 형사 취조도 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두사람이 각각 좋고 나쁜 역할을 나눠 맡는다. 당하는 자는 말이 통하는 좋은 사람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재 요청을 한다. 좋은 역할을 맡은 자는 흉악한 모습으로 호통을 친다. 그 순간 이성은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이게 협박의 기본 장치다.

 

나는 무능하다라는 사실을 맛보게 될 때 반사적으로 그 원인이 내 외부에 있으며, 나보다 강력한 게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이나 자기실현을 방해하고 있다는 얘기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몸에 지니게 된다. ‘무서운 것에 굴복하는 능력을 체득하는 게 오이디푸스라는 과정의 교육적 효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