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에릭 와이너의 책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스토아학파의 모토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라”라는 것이다.
소로의 저항 정신은 10대의 마음을 끈다. 니체의 불꽃같은 아포리즘(aphorism, 경구)은 젊은이를 끌어들인다. 자유를 강조하는 실존주의는 중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스토아철학은 나이 든 사람의 철학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라는 스토아 사상의 정수를 드러내는 말을 남겼으며, 빌 클맅턴은 마르쿠스의 <명상록>을 지혜가 가득한 작품으로 여겼다.
베를린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1. 사실적 지식
2. 절차적 지식
5. 인생에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6.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 – 인공지능도 해결 못하고 있음
스토아 철학의 핵심 교리 – 바꿀 수 있는 건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건 받아들여라-는- 격동의 시기에 매력을 뽐낸다.
스토아학파의 핵심 주제는 바로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로마의 노예였다가 철학자로 변신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렸고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모든 게 본인에게 달렸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자기 운명의 통제권을 갖는다. 정말 그런가? 통제 가능한 건 무엇인가?
대부분이 자기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부, 건강, 명성도 통제할 수 없다. 본인의 성공과 자식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에픽테토스 철학은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무지를 진정한 지혜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여겼다. 철학은 “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삶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의 생각과 충동,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감정적 삶은 지배가능하다. 내면세계를 지배하면 천하무적이 된다고 스토아철학은 말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 상사나 변덕스러운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어 같은 타인의 손에.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타인에게 이양해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게 훨씬 쉽다.
스토아 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스토아 학파는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자기 감정이 정확하다거나 부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그냥 감정이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스토아학파는 통제가능하다고 말한다. 감정은 해변의 파도처럼 그냥 밀려오는 게 아니다. 감정이 드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듯 자신의 감정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틀린 감정은 외부 사건( “인상”)에 대한 반사반응(“최초 정념”)에서 시작된다. 발가락을 찧으면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이런 반사 반응은 그것에 “동의”할 때에만 감정이 된다고 스토아학파는 말한다.
인상에서 동의로 이어지는 끈을 잘라야만 한다. 고난에 대한 우리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최초 정념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동의해 보라고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고독에 평온함이란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스토아학파는 자발적 박탈이라는 걸 실천하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잇다. 더우면 땀 흘리고, 추우면 몸을 떨며, 굶주렸을 때는 그심한 배고픔을 느낀다. 자발적 박탈의 목표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때때로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덜 얽매이게 된다. 이는 자제력과 용기를 길러준다.
스토아 학파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을 해 대비해야 한다고 한다. 미래 고난의 상상은 걱정과는 다르다. 걱정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고난 예상은 구체적 행위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고난이 가진 영향력을 빼앗고 지금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할 수 있다.
예상된 고난은 힘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그 크기가 줄어든다.
황제 마르쿠스는 너무 무르다. 그는 그 무엇도 옳거나 그르다고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상정하지 않는다. 그는 고질적 자기회의와 싸우고, 인간으로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다.
‘운명이 허락한다면’ 이라는 유보조항은 삶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스토아철학의 기술이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욕망한다는 의미는 지금 내게 없는 걸 바란다는 뜻이다. 니체는 말한다. 운명에 체념하지 마라.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지 말라.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욕망하라.
우리 모두는 각자 조금씩 로고스를 지니고 있다. 스토아철학에 따르면 로고스는 전 세계에 스며 있는 신적 지성이다. 이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며 유일하고도 진정한 행복의 근원이다. 우주에는 신적이면서도 전적으로 합리적인 지성이 스며 있다. 이성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우리는 이 지성과 악수를 나눈다. 스토아학파에게 이성적 행동은 냉정한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이성적 행동은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행동이며 거기에는 냉정한 점이 조금도 없다.
고난의 다른 이름은 상실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것과 그렇지 않은 걸 혼돈한다. 스토아철학은 헷갈릴 피요가 없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빌릴 뿐, 절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잃어버릴 게 없다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다.
잃어버린 걸 걱정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마르쿠스는 말한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게 언젠가는 나무의 이파리처럼 사라질 것이므로 “기쁨 때문에 그것을 너무 소중히 여기다 그것이 사라질 때 마음의 평화가 깨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보다 더 큰 상실은 없다. 스토아철학은 슬픔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지나친 슬픔은 인정하지 않는다. 세네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친구에게 “눈물을 흐르게 두라. 하지만 동시에 멈추게 하라”라고 말했다. 치료 불가능한 병에 걸린 자기 아이가 죽어가고 있을 때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이를 살뜰히 돌보고 더 나은 아빠가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