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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과 바넘효과

책속의지혜 2023. 3. 10. 16:36

바넘 효과 (Barnum effect)란 말이 있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경향이다. 종교, 점성술, 성격 검사, 새해마다 보는 토정비결, 오늘의 운세 등을 자신의 신념이나 실천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이에 해당된다.

 

조선 후기 정초에 토정비결의 괘()로 한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세시풍속이 있었다.

 

토정비결은 8(하늘, , , , , 연못, 천둥, 바람)를 사용한다. 하늘과 땅을 조합(중복 허락)하면 6개 생기는데 이를 육효()라고 부른다. 각 효의 변수를 세개로 본다. 토정비결은 144 (=8X6X3) 개의 경우의 수가 나온다. 나이, 출생 월··시를 숫자로 따지고 주역의 음양설에 근거해 1년의 신수를 본다.

 

토정비결은 미신이자 점술서란 견해와 윤리적인 실천 강령이나 도덕률을 모은 교육서란 의견이 있다.

 

운세(運勢, fortune-telling)란 삶에 대한 정보를 예언해 보는 행위이다. 이와 비슷한 점복은 영적 존재의 개입 등 다소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운세를 맞추는 사람은 점쟁이, 역술인, 역술가, 사주쟁이 등으로 부른다.

 

주역(周易)은 천지 만물의 흥망성쇠와 해와 달의 변화로 인한 자연 사계절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의학, 풍수지리학, 역학, 관상 등의 기본 바탕은 주역이다. 역학은 주역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전통 철학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변화를 다룬다.

 

사주팔자는 역학의 한 분야로써 태어날 때 태양의 위치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별자리 점에 가깝다. 점을 보려면 주역보다 사주명리학이 더 낫다. 사주명리학은 세상이 움직이는 순리인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길흉화복을 예측한다.

 

주역을 역경(易經)이라고도 하며 사서삼경 중 하나다. 천체 관찰로 만들어졌기에 자연과학이 바탕에 있다. 오래됐지만 토정비결 내용도 얼추 맞다. 생활 방식은 달라졌지만 인간 세상살이는 되풀이되기에 그런게 아닌가 한다.

 

점복 행위는 동서고금 널리 존재해 온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다.

 

점성술이 나온 배경이 궁금하다. 다음은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에 나오는 내용이다.

 

만물의 변화는 자연법칙을 따른다. 과학 지식으로 우리 삶을 발전시킬 수 있다.

 

조상들은 달 없는 밤 모닥불이 사그라지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장관을 연출한다. 상상의 그림을 그렸다. 꼼꼼히 천문 현상을 관측하는 재능이 있는 자는 별 해 달이 천구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기록해 하늘에 걸려 있는 달력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보유 능력에 따라 목숨이 좌우되기도 했다. 자연 순환 현상으로 죽음 너머의 또 다른 삶을 짐작했다. 저 높은 하늘을 영생불사의 암시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 법칙에 의존하던 과학의 영역에 신비주의와 미신이 치고 들어온다.

 

해와 별은 계절, 식량, 기후를 다스리고 달은 조수간만, 동물의 생활주기, 인간의 월경주기를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내용은 자손 번성과 관련이 있다.

 

하늘의 천체가 인간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친다고 여겼다. 점성술은 이렇게 시작됐다.”

 

알퐁소 도데의 단편 소설 <>이 떠올랐다. 여기서 별은 아름다운 자연이다.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렸었는데 양치기 소년의 애틋한 짝사랑 얘기다. 장소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산골 방목지이다.

 

목동 소년과 그의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모닥불 옆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그들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도 별들이 반짝거렸다. 아가씨는 소년에게 별자리를 알고 있는 지 물었다. 싱그럽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의 어깨 위에 가볍게 눌러옴을 느꼈다.

그것은 졸음으로 무거워진 그녀의 머리가 그의 어깨 위에 기대온 거였다. 소년은 그녀가 잠자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까지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잠을 잤다.”

 

국어 선생님이 글을 읽다가 군말했다. “너희는 지금이 기회다하고 흑심을 품었을 것이라고.

매우 추운 겨울 새벽 뒷간 가다 본 밤하늘의 무수한 별은 초롱초롱했다. 얼음장같이 차디차 보였다. 상황에 따라 다른 느낌이다.

 

시골 나의 생가 뒷집에 늙은 어머니와 미혼인 딸이 함께 살았다.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예수쟁이'라 불렀다. 새벽 430분이면 아래 동네 예배당 종소리가 "댕그랑, 댕그랑" 하고 새벽잠을 깨웠다. 어린 나이에 믿을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기독교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실이었다. 낳은 아버지를 제쳐 두고 본적 없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일이 어린 나이에 이해 불가능했다. 지금 나도 하느님 아버지그런다. 난 냉담 중인 가톨릭 신자다. 생물학적 아버지도 나약한 한 인간임을 나중에 알았다. 나의 아버지와 하느님 아버지의 개념은 완전히 달랐다.

 

어머니께서는 불교를 믿으셨는데 독실한 건 아니었다. , 누나들 결혼 전 궁합은 본 거 같다.

 

처가에서 결혼 전에 점을 본 모양이다. 점괘는 '평생을 공부할 사람'이었단다. 역시 바넘 효과를 노린 말이다. 따져 보면 모두에게 맞는 말이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라고 한다. 살면서 정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공부라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자각하려는 시도는 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대부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발언이나 행동 감정적 반응에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기회를 잃는다.

 

'난 날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게 아닐까?'

 

무지의 지를 갖추면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초월하는 시야를 가진다. 무지의 지가 미지를 향한 탐구심과 학습 의욕을 살리고 난관을 차례로 뛰어넘게 해준다.”

 

신년 초 한해 토정비결을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지난해와는 다른 삶을 도모하려는 시도이다. 반복된 삶을 벗어나 한해를 새롭게 맞이하려는 마음가짐이자 의지 표명이다. 친구가 지난해 같은 날에 적은 일기를 보니 똑같은 내용이었다고 했다.

 

 

되풀이되는 하루에 대한 영화가 있다. 제목이 <사랑의 블랙홀 >이다. 로맨틱코미디 영화다. 인터넷에서 공짜로 볼 수 있다.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양력으로 35일 또는 6)과 비슷한 성촉절(Groundhog Day, 22)에 일어난 얘기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인공 필 코스너는 심술궂은 TV 기상 예보관이다. 그는 성촉절 축제 취재하려 펜실베니아 펑서토니에 갔다. 취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또 성촉절임을 깨닫는다. 평범한 마을에 갇혀 똑같은 날을 살며 재미없는 기사를 취재하는 운명을 반복한다.

 

그는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라는 축복이자 저주와 씨름했다. 철학의 주요 주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무엇이 도덕적 행위인가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는가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가.

 

사랑의 블랙홀 속 필 코스너와는 달리 우리는 삶이 반복됨을 인식 못 하고, 이를 수정할 수도 없다.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이 빠짐없이 똑같이 반복해 일어난다.

 

니체는 이같은 생각에 영원회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영원회귀를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했다. 모든 일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면 인생에 가볍고 사소한 순간은 없다. 영원회귀를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준으로 삼으라고 한다.

 

자기 자신의 극복은 진정으로 나답게 사는 일이다. 이게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삶이다. 어떻게 해야 나답게 살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다음은 <마흔에 읽는 니체>에 나오는 내용이다.

 

기독교는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계를 암묵적으로 폄하한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는 참된, 신의 세계였던 '저 세계'를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제 신의 자리를 물질 만능주의가 차지하고 있다.

 

신의 죽음으로 인간은 자신을 구속했던 신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인간은 자기 자신과 삶의 의미를 든든하게 지탱해 줬던 토대가 사라졌다. 인간은 살아가는 의미를 잃고 방황하게 됐다. 판에 박힌 낡은 일상이 반복된다.”

마지막 문장이 위에서 말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내용이다.

 

인간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은 초인이라는 새로운 삶의 목표를 긍정함으로 시작된다. 니체가 말한 '초인''힘에의 의지'로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인간 유형이다. 영원한 존재였던 신도 죽었고, 영원불변한 이데아의 세계인 천국도 사라졌다.

 

니체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삶에서 지금 이 순간은 단 한 번밖에 없다."라는 점이다.”

 

니체는 서양철학의 나쁜 남자다. 이단아다. 똑똑하고 선견지명이 가득해서 무시 불가능한 날라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흠뻑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 불안증을 만물의 영장이 된 상대적 짧은 기간 탓으로 돌린다. 인간의 의지, 욕망 혹은 자아도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부분 당당한 존재들이다. 수백만 년간 지배해온 결과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반면에 사피엔스는 중남미 후진국의 독재자에 가깝다. 인간은 최근까지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의지는 뇌 속의 뉴런이 생화학 신호를 교환한 결과다. 내 자아도 내가 속한 문화적, 유전적 성향을 철저히 따라가기 마련이다. 수많은 외부의 메시지, 집단의 압력, 타인의 시선, 받아온 교육이 수시로 영향을 미치며 나의 자아를 형성해 나간다. 나의 순수한 의지 혹은 진정한 자아가 실재하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위 문단은 구조주의 철학자(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의 주장과 맥락이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하라리는 삶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구적인 신념, 욕망, 자아에 큰 의미를 두지 마라. 모든 것은 변하며 지속적인 본질은 없다. 최고의 선, 지고의 가치, 진실한 사랑 같은 것들에 집착하면 할수록 예정된 실패로 인한 상실감이 커질 뿐이다. 절대적 우위의 가치, 이념, 진실은 있을 수 없다상대적 최선을 추구하되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것, 그로 인해 타인의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탐사해 나가는 일이 현재로선 삶을 대하는 최선의 지혜다.”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또한 인간 사회 체계(system) 속에 살면서 나 본연의 자신을 찾는 일이 가능한가?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法語)가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