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로벨리--
이탈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양자이론과 중력이론을 결합한 ‘루프양자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로, ‘제2의 스티븐 호킹’이라 평가받는다.
마들렌의 향기
(마르셀 프로스트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적셔 한입 베어 물면서 그 향기에 취해 과거 회상이 시작된다고 한다.)
로벨리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책 속의 소제목 내용으로 시간에 대한 서양 철학자의 생각을 담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 실체인가?
이 세상은 실체는 없고 서로 결합하는 사건으로 이뤄져 있다.
나는 누구인가?
'마차'는 바퀴, 차축, 멍에 등이 모여 함께 작동하고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맺는 전체 관계망을 나타낸다.
이처럼 '나'도 관계와 사건들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과정, 사건,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
우리가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의 정체성과 유일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가 많다.
1. 우리 각자를 세상을 보는 '하나의 관점'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성찰하여 통합된 방식으로 설명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2. 세상을 성찰해 실체들로 조직화한다. 세상을 그룹화하고 분류한다. 세상과 상호 작용을 원활히 하기 위함이다.
신경체계도 감각적 자극을 받고 정보를 정교화하며 행위를 만들어낸다. 신경망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수정하며 유입 정보의 흐름을 예측하는 유연한 동역학계를 형성한다.
신경망은 다소 안정적인 고정점과 입력 정보에 나타나는 반복 패턴을 연결하면서 시간에 따라 변한다.
'사물들'은 '개념들'처럼 감각적인 입력 정보의 반복된 패턴과 이에 대한 연속적인 정교화 작업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곧 신경 동역학계의 고정점이다.
'사물들'은 세상 양상들의 결합을 반영한다. 이 결합은 세상의 반복적인 구조와 상호 작용하는 우리와의 연관성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삶은 사회적이고 많은 상호작용을 하기에
'다른' 인간들을 구성하는 과정들의 총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그룹화한다. 그건 우리와 관련 깊은 인간의 매듭들이다.
상호 작용으로 '인간'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작가는 내면적 성찰이 아닌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자아 개념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생각은 동료와의 관계를 조절하려고 발달한 정신적 회로를 각자에게 적용할 때이다.
데카르트는 생각한다는 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임을 주장한다.
스스로를 주체라고 생각하는 경험은 복합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불교에선 육체가 존재해야 정신이 생긴다고 한다. '나'라는 존재는 태어나자마자 사회 속에서 먼저 인식된다.)
나 자신이 아닌 내 주위의 세상을 봄이 나의 일차적 경험이다.
'자아 개념'을 가짐은 자신에게 어떤 부가적 특성을 지닌 인간임을 투영하는 법을 배워서다.
이 특성은 다른 구성원과의 관계를 맺도록 진화하며 발달한 능력이다.
타 인간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진 생각의 반영이다.
3. 자아 형성의 또 다른 요소는 기억이다.
우리는 연속된 순간 속의 독립된 프로세스 집합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은 기억으로 세 겹짜리 특별한 끈으로 우리의 과거와 단단히 엮인다.
현재에 과거의 흔적이 떼지어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사'이고 얘깃거리다.
난 내 인생이 담긴 한 편의 장편소설이다.
시간 흐름 속에 우리를 형성한 프로세스는 도처에 깔려있다. 기억은 이들을 단단히 묶는다.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는 점은 시간에 대한 생각이다. 시간을 이해한다고 자기 성찰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뇌는 과거의 기억을 수집해 지속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는 짧거나 긴 시간 간격의 스펙트럼에 작용한다.
과거와 미래 사건 사이에서 생존 기회 선택이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이다.
이 선택이 시간의 '흐름'이다.
신경계는 움직임을 즉시 알아채는 기본 구조가 있다. 물체가 한 장소에서 금방 다른 데로 이동하면 뇌는 이 두 위치에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두 신호를 받지 못하는 배선 구조다.
움직이는 뭔가와 관련된 하나의 신호만 감지한다.
인지하는 건 유한한 시간 동안 작용하는 계에서 보면, 우연히 발생해 시간이 흐를수록 확대되는 어떤 것이다. 뇌에서 시간 흐름에 따른 확장은 기간의 인지로 축약된다.
우리가 언제나 현재에만 있다면 어떻게 과거를 확실하게 아는 걸까? 지금 이곳엔 과거와 미래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린 결론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재고 있다. 내 머리가 시간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우기도록 하면 안 된다. 시간을 측정할 때마다 내 머릿속의 현재에서 뭔가를 측정하고 있다. 시간이 이렇지 않다면, 나도 시간이 뭔지 모르겠다."
우리가 시계로 기간 측정은 불가능하다. 기간은 서로 다른 두 순간에 시계를 봐야 측정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순간에 있지, 두 순간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현재만 본다. 과거의 흔적을 보는 것과 시간 흐름을 인지함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차이의 근원이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일이 내면적이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그것은 내면의 일부고, 뇌에 남은 과거의 흔적들이다.
그는 음악의 힘을 빌었다. 우리가 어떤 찬가를 들을 때, 하나의 소리는 이전과 이후의 소리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다.
음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는 우리의 인지력이 기억과 예측을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찬가나 노래는 우리에게는 시간으로 받아들여지는 뭔가와 함께 통합된 형태로 머릿속에 나타난다.
음악은 시간이다.
우리의 머리에 기억과 예측으로 있고, 전체적으로 현재에 있는 시간이다.
서양철학 사상에서는 시간의 '외적' 특성보다는 '내적' 특성에 관한 예측이 등장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과 시간의 특성을 논했다. 시공간은 모두 지식의 선험적 형식으로, 즉 객관적 세상뿐 아니라 이를 파악하는 방식도 관련이 없다고 한다.
그는 공간이 '외적' 감각에 의해 즉 우리 '외부' 세상에 있는 사물을 보고 이들에, 또한 시간은 '내적' 감각으로 '내적'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세상의 시간 구조의 기초는 우리 생각의 작용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봤다.
후설은 '과거 지향'(혹은 '보존')에 의거해 경험 형성을 설명할 때 멜로디 청취의 은유를 사용했다.
어떤 음을 듣는 순간, 이전 음이 '보존'되고, 그 다음에는 보존된 음이 보존되고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현재는 점점 더 희미해지는 과거의 연속적 흔적을 포함한다. 이런 보존과정으로 현상이 '시간을 구성한다'라고 후설은 말한다.
물리적 세계에는 선형적 방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물리적 시간은 없지만, 엔트로피 변화로 만들어진 흔적은 있다.
하이데거는 "시간은 인간의 척도 내에서만 시간화 된다 "라고 썼다. 그에게도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고 무엇을 하기 위한 시간, 인간이 전념하는 일을 위한 시간이다.
시간의 내적 의식이 존재의 지평임을 확인한다.
뇌는 외부 세상과 마음의 작동구조의 상호 작용에 의존하는 실재의 일부다.
정신은 뇌 작용이다. 이런 작용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점은 뇌 전체가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에 기초해 작동한다는 뜻이다.
시냅스는 수천 개씩 계속 만들어지지만, 잠자는 동안 과거 신경계에 작용하던 흔적에 대한 희미한 생각만 남겨두고 사라진다.
희미한 이미지는 눈이 매 순간 수백만 가지의 세부 사항을 보고 있기에 기억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분명히 세상을 담고 있다.
프루스트는 경계 없는 공간과 현실적이지 않은 미세한 것들의 무리, 향기, 생각, 감각, 성찰, 고민, 색상, 물체, 이름, 시선, 감정 등을 발견한다. 이 모든 게 뇌 주름 속에 있다. 이게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내면의 신경에 남아 있는 중요한 과거의 흔적이 있는 곳에 시간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기억은 흔적의 총체이자 세상의 무질서와 엔트로피 방정식의 간접적 산물이다.
이 방정식은 세상의 상태가 과거는 특별한 구성었으며 이로 인해 흔적도 남았다는 걸 말한다. 우리는 아주 드문 부분 계와 관련돼 있기에 '특별'하다.
우리는 얘기다. 눈 뒤쪽에 있는 20cm 영역 속에 담긴 애기다. 또한 선이다.
혼란스럽고 거대한 우주의 조금 특별한 모퉁이에서 세상의 일들이 뒤섞이면서 남긴 흔적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고 엔트로피를 성장시키도록 맞춰진 그 흔적들이 만든 선이다.
이 공간, 즉 앞날을 예측하려는 우리의 연속적인 과정과 결합된 기억이 시간을 시간으로, 우리를 우리로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내적 성찰로 공간이나 물질이 없는 곳에서 존재하는 일은 상상할 수 있다. 시간 흐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속한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특별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을 하고 흔적을 남기며, 물리적 실체인 우리가 기억과 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사소하지만 귀중한 시간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해준다. 시간은 우리를 세상의 일부와 접하게 해준다. 시간은, 기억과 예측을 하는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우리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지금 여기에, 우리 기억 속에, 우리 예측 속에 있다.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 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이 시간이다. 이런 특성이 우릴 매혹시키며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 구조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이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원에 대한 허무한 환상을 만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