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이이잉 뒤이이잉 뒤이이잉’ 진동 모드의 핸드폰 전화 벨이 울렸다. 학부와 대학원을 함께 다닌 77학번 복학생 동윤형으로 무박 지리산 종주 산행을 가자고 했다. 2005년 2월 5일 경으로 산행 출발 일주일 전이었고 봄철 산불 방지 입산 금지가 시작 되기 전 마지막 날 산행이었다. ‘가고파 산악회’에 예약을 하고 보험 가입을 위한 신상 정보를 문자로 산악대장에게 보냈다.
옅은 회색 베일로 지면을 덮은 듯한 박무가 끼었고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겨울이었다. 스산한 잿빛 겨울에 내 마음도 웬지 개운찮았다. 어깨는 쑤시고 묵직했다. 건조한 탓인지 코감기는 겨울내내 나를 괴롭혔다. 일상이 갑갑하고 지겹다고 느낄때 훌쩍 어디론지 떠나 가고픈 생각이 든다. 지리산은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산행은 분위기 반전의 좋은 기회였다. 금요일 저녁 11시에 서초구청 앞에서 전세버스로 출발하여 새벽에 산청군 중산리에 도착 후 산행을 시작하는 일정이었다. 중산리 매표소에서 천왕봉까진 4.5km,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진 25.5km, 노고단에서 성삼재까지 2.6km로 합하면 32.6km의 거리가 된다. 새벽 4시에 산행 시작하여 늦어도 저녁 6시까진 성삼재에 도착해야 했다. 총 14시간을 걷는 셈이었다.
버스 출발전에 인원 점검이 있었고 그때까진 알고 지낸 사람끼리만 잡담을 나누는 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버스가 서울 시내를 벗어나고 실내등이 꺼지자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친 일상을 벗어난 안도감 때문일까? 설렘으로 꿈속에서 지리산을 미리 만나 보기 위함일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산행인데 이 추운 겨울에 고생을 사서 하는지? 동일한 무게의 바벨로 세트를 진행하면 근육에 무리가 간다. 세트별 무게를 조금씩 다르게 하여 근육이 느끼는 강도를 다르게 하면 잘 다치지 않는다. 자신이 사는 친숙한 영역 밖의 지리산 산행은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결같이 지루한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에 홀가분하고 덜떤 기분이었다. 산행은 심신에 변화를 주는 활력소였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어설픈 잠이 들었다. 영하의 차가운 겨울 새벽 공기가 콧구멍을 휘돌아 뇌속으로 파고 들어 왔다. '철거덕' 버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산행이 일상의 삶보다 육체적으로 더 힘듬에도 참을 수 있는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딱딱 딱딱” 무거운 등산화 내딛는 소리와 “헉헉 헉헉” 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새벽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사실 대학원 1년 차인 1984년 여름에 첫 지리산 종주를 했다. 역시 같은 동윤형과 함께였다. 저녁 11시 30분 출발하는 밤열차를 타고 구례역에 내려 화엄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어두워질 때 쯤 첫날 야영지인 임걸령에 도착했다. 민둥한 능선에 위치한 장소였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간간이 마른 번개가 쳤다. 그 당시는 산 어느 장소에 야영을 해도 무방했다. ‘시어머니 길’로 일컬어지는 화엄사 계곡을 힘들게 올라 왔기에 피곤했지만 쌀랑한 밤공기에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곤란한 상황은 한밤중에 발생했다.
등짝으로 스멀스멀 기어드는 찬기운에 눈이 화들짝 떠졌다. “후두두둑 후두두둑, 휭휭, 퍼더덕 퍼더더덕”. ‘후다닥’ 텐트 밖으로 튀어 나왔다. 계곡에서 불어올라 와 능선을 타넘는 바람이 텐트를 날릴 기세로 불었다. 세찬 바람에 텐트가 반쯤 기울어져 지지 노끈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땅바닥이 파일 정도의 장대비로 민둥 능선에 한 동뿐인 텐트 주위가 온통 물바다였다. 텐트 위에선 비가 새고 밑에선 물이 차올라 왔다. 방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방갈로 형태의 텐트였고 배수로를 깊게 파지 않은 탓이었다. 굵은 장대비에 흠뿍 젖은 나에게 조난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2시간 거리에 있는 뱀사골 산장(현재는 없어졌음)으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빗속에서 텐트를 신속히 거두곤 빗속을 걸어 도착한 산장에서 이틀밤을 보냈다.
산장에선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비는 내렸다 그쳤다를 계속했다. 점심때쯤 아버지뻘 되는 한무리의 등산객이 도착했다. 산장 안은 새로운 손님으로 한동안 왁자찌껄했다. 자려고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흥미있는 얘기가 늦은 밤에 쏟아졌다. 불끄고 자려 할 때의 누군가의 귀신 얘기는 모두가 배곱 빠질 정도로 웃겼다. 웃음소리는 빗소리와 함께 앙상블을 이뤄 지리산 깊은 계곡으로 울려 퍼졌다. 깊은 산속. 외딴 산장. 바깥은 비바람이 세차게 내렸다. 살짝 두려움에 떨 주변 상황이었다. 유머러스한 입담에 웃음은 불안을 떨쳐 내기에 충분했다.
이른 아침 찬공기에 눈이 떠졌다. 누가 바깥으로 나가면서 문을 약간 열어 논 모양이었다. 갑자기 유혹의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진한 커피 향이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산장지기가 커피 원두를 갈고 있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만큼 그 냄새는 뇌리에 뚜렷이 박혀 있다. 그 때문인지 요즘 원두를 직접 갈아 마시는 여유를 부린다.
성삼재에 도착하니 저녁 6시. 간간이 내리던 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전북과 경남의 산악 구조대가 응급상황을 신고한 사람을 구조하러 출동했다고 한다. 포천 막걸리를 나눠 마신 그 분이 분명했다. 119 구조헬기 불러 하산 하자고 꼬드낀 분이었다. 겉으로 보긴 멀쩡했었다.
신경전문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라는 책 내용이 생각났다. 자신이 홀로코스트의 체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라는 치료법을 창안했다. 키르케고르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에 중점을 둔 실존론적 분석이 기반이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가장 강력한 자극이자 원동력이 된다는 믿음에 근간을 두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이 크리스마스 전에 풀려 날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기대와 달리 1월이 돼도 풀려나지 않자 삶의 끈을 놓아 버렸다고 한다. ‘삶의 의미’를 잃은 자들은 어떤 협박과 발길질에도 꼼짝 않고 누워 있다가 2~3일 내에 죽었다고 한다. 상황은 다르지만 자기를 구조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의지를 정말 버릴지 궁금하다. 남과의 싸움에서 지면 분해 화가 난다. 자기 자신에게 질 때의 심리 상태는 어떨까? 자존감 상실로 삶의 의지가 꺾히고 버림을 받은 느낌일까?
장시간 산행으로 지친 몸을 실은 버스는 궂은 날씨 속에 성삼재를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