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발췌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 하는가(계속)--에리히 프롬

책속의지혜 2019. 1. 11. 16:14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선생님, 강해지고 싶습니다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인간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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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아의 실현이란 무슨 뜻일까?

 

자아실현이란 전인격의 실현을 통해, 모든 감정적 가능성과 지적 가능성이 활발하게 표현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능성은 모두에게 깃들어 있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만큼만 실현된다. 적극적 자유는 통합된 전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

 

자발성이란 심리학의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자발적 활동이란, 고립이나 무기력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제적 활동이 아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행동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동인형 같은 순응주의자의 활동도 아니다. 자발적 활동(spontaneous activity)이란 라틴어 어원 ‘sponte(자유의지로)’의 뜻 그대로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의 활동은 어떤 것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활동이란 감정의 영역은 물론이고 지적, 감각적, 의지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의적 활동을 말한다. 자발성의 전제 조건은 인격을 전체로 받아들이고 이성본성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의 본질적 부분들을 억압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게 명료해질 때, 삶의 다양한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 시켰을 때에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발성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실천한 인물들 대부분은 예술가들이다. 그들의 사고, 감정, 행동은 자동인형의 표현이 아니라 자아의 표현이다. 예술가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정의를 인정한다면 몇몇 철학자, 학자들 역시 예술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 역시 자발성을 발휘하는 좋은 예이다. 아이들에게는 진짜 자기감정을 느끼고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발성은 아이들의 말과 생각에서,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에서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큰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 자발성이다. 자발성은 그것을 느낄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무감각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사실 자발성만큼 매력적이며 설득력 있는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순간이나마 자신의 자발성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순간,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어떤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깊은 고민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틀에 박히지 않은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느꼈을 때,

타인에 대한 사랑이 솟구쳐 오를 때,

우리 모두는 자발적 체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그런 체험이 보다 자주, 그리고 세련되게 찾아온다면 인간의 삶, 스스로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어렴풋하나마 예감하게 될 것이다.

 

자발적 활동이 어떻게 자유에 대한 질문에 해답이 될까?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인 소극적 자유만 있다면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되고 만다. 불신에 가득 차서, 연약하고 항상 위태로운 자아를 가진 채 세상과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고 만다.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도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의 자발적 실현을 통해 인간은 새롭게 세상-인간, 자연,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사랑이다.

 

사랑은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역동적 성격은 분리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개성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에서 탄생하는 양극성에 있다. : 하나면서 동시에 둘로서 존재하게 함

 

자발성의 또 다른 요인은 노동 이다. 여기서의 노동은 고독에서 도피할 목적의 강제적 활동이 아니며, 한편으로는 자연을 지배하려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만든 생산물을 우상화하거나 이 생산물의 노예가 되는 활동도 아니다. 인간이 창조의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노동이다.

 

사랑과 노동에 해당되는 사항은 감각적 공동체 정치 활동에의 참여 같은 모든 자발적인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자아의 개성을 긍정함과 동시에 자아를 타인 및 자연과 하나로 만든다. 자유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분열-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이 인간의 자발적 활동을 통해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되는 것이다.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은 물질의 소유에도, 감정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인간이건 생명 없는 사물이건 창조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속성들만이 우리의 자아에 힘을 주고, 자아가 온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아준다.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활동 그 자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무게중심이 거꾸로 되어 있다. 우리는 구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산하는 대신, 상품을 팔겠다는 추상적 목적을 위해 생산한다. 그리고 창의적 활동이 주는 순간적 만족에서 완제품의 가치로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만족-활동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을 잃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 어렵고, 힘들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찾아오는 창조의 순간, 그 순간의 기쁨과 만족을 잃고 찾은 완제품의 가치는 하루를 넘길 수 없다. 새로운 생산품은 물밀 듯이 밀려들고, 오늘의 성공 역시 내일 다른 이의 성공 앞에서 빛을 잃는다. 끝없는 소비의 욕망, 성공의 욕망에 가치를 두는 삶은 채울 수 없는 갈증과 공허를 낳는다.

 

자발적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개인은 더 이상 고립된 원자가 아니다. 그와 세상은 질서정연한 전체의 부분이 되고, 그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얻게 되며, 그럼으로써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도 사라질 것이다. 고립과 좌절 탓에 생긴 회의는 강제적으로, 자동인형처럼 살지 않고 자발적으로 산다면 그 즉시 사라진다. 그는 자신을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느끼며, 삶 자체의 완성만이 삶의 단 하나의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개인이 자신과 세상 속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의혹을 극복하고 자발적 체험의 행위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면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면, 개체로서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안전도 확보된다. 여기서의 안전이란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가 최초의 애착과 구분되듯 개인주의 전 단계의 특징인 안전과 구분된다. 삶의 비극적 측면이 완전히 제거된 안전도 아니다. 새로운 안전은 역동적이다. 타인의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 활동에 근거한 안전이다. 인간이 매순간 자발적 활동을 통해 얻는 안전이며, 자유만이 줄 수 있는 안전, 착각을 필수적으로 만드는 조건을 차단하였기에 착각이 필요 없는 안전이다. : 하루하루를 완전한 나, 완전한 본성적 인간으로 살아감으로 해서 후회하는 어제도 없고, 갈망하는 내일도 없는 삶. 충만한 순간순간은 이미 그 자체로 안전한 것이 아닐까..

 

자아실현으로서의 적극적인 자유는 개인의 고유함을 완벽히 긍정한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다르게 태어난다. 두 유기체가 생리학적으로 다른 것처럼, 두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개인적 토대 역시 동일하지 않다. 진정한 자아의 발전은 항상 이런 특수한 토대를 바탕으로 한 성장이다. 이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씨앗의 발아, 유기적 성장이다.

 

유기적 성장은 타인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을 자신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 못지않게 최대로 존중해야만 가능하다. 자아의 고유함을 이처럼 존중하고 장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문화가 이룬 가장 값진 업적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오늘날 커다란 위험에 처한 것이다.

 

자아의 고유함은 결코 평등의 원칙과 모순되지 않는다.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주장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기본적인 인간 속성이 있으며, 모두가 인간 존재로서 같은 운명을 겪고, 모두가 자유와 행복을 누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갖는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인간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연대의 관계라는 의미이다.

 

평등이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의미로 오해된 것은 오늘날 인간이 경제적 영역에서 맡는 역할 탓이다. 구매하는 사람과 판매하는 사람의 관계에서는 인격의 구체적 차이가 배제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쪽은 무언가를 팔아야 하고, 다른 쪽은 그것을 구매할 돈이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경제생활에서는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구분이 없다. 하지만 실제 인간으로서의 그들은 서로 다르며 그 특수성(고유함)의 장려가 개성의 본질이다.

 

긍정적 자유에는 이런 고유한 개인의 자아보다 더 높은 권력이 없다는 원칙도 포함된다. 인간은 자기 삶의 중심이자 목적이며, 개성의 실현은 이른바 더 값지다고 주장하는 그 어떤 목적에도 결코 종속될 수 없는 목적이다.

 

(그러나)가장이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행하는 모든 교육들은 이러한 자발적 활동을 억압하여 진정한 개성을 발전하지 못하도록 침해하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독창적(그전에 누구도 해 본 적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origin)이 자신의 활동, 자신의 생각에서 나왔다는 의미)인 정신 활동들이 다른 종류의 감정, 생각, 소망으로 뒤덮인다.

 

아이들이 갖는 자연스런 거부감, 적대감 역시 자발적 행동이다. 아이들은 주변 세계와의 갈등을 통해 일정 정도의 적대감과 반항심을 표출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위험하고 나쁜 것에 대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갖는다. 그러나 교육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이런 적대적 충동의 제거이다. 결국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거부감과 적대감을 숨기게 되고 결국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엔 가짜 감정, 가짜 친절, 가짜 웃음이 자리 잡는다. 진짜를 구분하는 법조차 잃어버린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또 하나의 금지된 감정이 있다. 그 억압은 저 깊은 곳 인격의 뿌리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바로 비극의 감정이다. 죽음과 삶의 측면의 자각은 확실하건 그렇지 않건 인간의 기본 특성 중 하나이다. 모든 문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처한다.

 

우리 시대는 죽음을 아주 간단하게 부인함으로써 삶의 기본적 측면을 부정한다.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자각을 삶의 가장 강한 동력으로, 인간적 연대의 토대로, 기쁨과 열정에 강도와 깊이를 선사하는 경험으로 만드는 대신 이런 경험을 억압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억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름, 다른 모습으로 우리 어디엔가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비합법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억압된 욕망, 경험들은 사유를 통해 진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깊이가 부족하다. 우리의 삶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 역시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죽음과 고통에 대한 자각, 대면은 삶을 보다 진실되게 이해하고, 삶의 가치를 보다 깊이있게 깨닫게 한다. 병든 몸은 건강한 몸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듯이..

 

감정의 터부화(금기시하는 것) 과정에서 현대 정신의학은 이중의 역할을 한다. 인간의 진실된 내면을 들여다보는 길을 열거나 혹은 인격을 조종하는 일반적 경향의 시녀가 되었다. 많은 정신의학자, 정신분석학자들은 너무 슬프거나 너무 분노하거나 너무 흥분하지 않는 정상적인격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경우 모두를 유아적혹은 신경증으로 치부하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과학적 근거를 만들어 사람을 규정짓는 것은 직설적인 비판보다 더 위험하다.

느낌과 감정 못지않게 독창적 사고 역시 왜곡된다. 우리의 교육은 아이들의 독자적 사고를 막고 그들의 머리에 완성된 생각(하나의 정답)을 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상은 아이들을 병들거나 나이든 사람만큼이나 무시하고 조롱하며 거짓으로 대한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 상호 연관도 없는 수많은 개별 지식들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킨다. 아이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점점 더 많은 불필요한 사실들을 배우는 일에 소모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할 시간을 잃어버린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사고는 공허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정보역시 사고의 걸림돌이 된다.

 

나는(에리히 프롬) 모든 인간 존재는 어떻게든 진리를 갈망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진리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찾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어린아이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진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아는지의 여부에 크게 좌우된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지팡이와 같다.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그를 더 약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온전하게 완성할수록, 다시 말해 자신을 잘 꿰뚫어볼수록 더 강해진다. 너 자신을 알라이것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기본 계명이다.

 

독자적 사고의 능력을 제거하는 또 다른 요인은 진리(진실)에 다가가는 일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의 기분 문제 대부분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이런 문제들은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중에게서 자신의 사고력을 믿고자 하는 용기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이런 주장에 설득당한 대중은 전문가의 진단과 그들이 내놓을 정답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게 된다.

그 결과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말이나 글로 표현된 모든 것에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자체를 갖게 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자라는 이들이 말한 모든 것에 유아적인 믿음을 갖게 된다. 냉소주의와 순진함의 결합은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자신이 사고를 하며 스스로 결단을 내릴 용기를 잃게 된다.

 

독창성의 결핍은 감정과 사고뿐 아니라 소망에도 해당된다.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내기는 특별히 힘겹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라는 것이 많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모조리 다 가질 수는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가지고 싶은 것을 갖는 데 쏟는다. 그러나 그 행동의 전제에 대해서는 물음을 갖지 않는다. 전제 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갖는 것,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대다수 현대인의 욕망이다. 그러나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높은 곳에 오를수록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느낀다.

 

이 모두는 진리의 관념이 모호하다는 증거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을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가 쉽거나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깨우쳐야 한다. 이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이다. 완제품으로 제공된 목표를 우리의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악착같이 회피하려는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우리의 소망이-우리의 생각과 느낌 역시-어느 정도까지 진짜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깨닫기가 이렇게나 힘든 것은 권위와 자유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역사를 통해 교회의 권위는 국가에게로, 국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는 양심의 권위가 건강한 인간 이성과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로 대체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응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런 착각은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도와주기는 하지만, 줄 수 있는 도움은 딱 거기까지이다. 근본적으로 현대인의 자아는 너무 허약해졌기 때문에 무력한 느낌,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린다. 더 이상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모든 것이 도구화된 세상에 살다 보니 인간도 자기 손으로 만든 기계의 일부처럼 되어버렸다. 인간은 타인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며, 그러느라 자유로운 인간의 진짜 확신의 근거가 될 자아를 상실했다.

 

자아의 상실은 타인에게 순응해야 할 필요를 더욱 키웠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는다. 나라는 존재가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정체성이 상실되면 순응이 더욱 시급해진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 때만 자신을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다. : 타인의 시선, 평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고,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이런 회의를 침묵시키고 어느 정도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는 실로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숨을 쉬고 육체적으로 살아 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다.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만족과 낙관론의 무대 뒤편에서 오늘날의 인간은 죽도록 불행하다. 실제로 그는 절망의 끝에 서 있다. 절망의 심정으로 개성이란 것을 붙들고 늘어진다. ‘다르고싶고 어떤 것을 다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칭찬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다름에 굶주렸다는 증거이며 우리에게 남은 개성의 마지막 흔적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삶에 굶주려 있다. 하지만 순응주의자이기에 삶을 자발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자극과 스릴의 형태를 띤 대용품을 움켜잡는다. 술과 스포츠가 주는 스릴이나 스크린 속 허구의 인물을 통해 경험하는 스릴 말이다.

 

 

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선생님, 진짜 성공이 뭘까요?”

 

인간의 자긍심은 그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가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느냐, 경력의 출발 시점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한마디로 그가 성공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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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행동 동기인 자아는 사회적 자아. 타인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에 따라 연기를 하는, 그가 맡은 객관적 기능의 주관적 위장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자아. 현대의 이기심은 사회적 자아를 대상으로 삼는 탐욕이며, 이는 진정한 자아의 좌절에 그 원인이 있다. 실제 현대인의 자아는 너무 허약해져서 전체 자아의 조각이 되었다. 다시 말해-전 인격의 다른 모든 요인은 배제한 채-지성과 의지력으로만 남은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결과물(물질세계)로부터 소외되었고, 자신이 지은 세계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인간이 창조한 세계가 인간의 주인이 되었다. 인간은 그 주인에게 허리를 굽히고 그를 최대한 조작하기 위해 애를 쓴다. 직접 만든 작품이 자신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인이 느끼는 고립과 무기력의 감정은 인간관계를 통해 더 강화된다.(아이러니) 인간은 서로를 조종하고 서로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며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모든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서 시장 법칙이 통한다. 경제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서로 싸우고 필요할 경우 서로를 경제적으로 파멸시키는 짓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현대인의 무관심은 피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고용주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employeremploy사용하다라는 뜻)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자본가는 다른 인간 존재를 기계처럼 사용한다. 피고용인과 고용주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이 관계는 양쪽 모두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서로에게서 이익을 취한다는 사실만 빼면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상인과 고객의 관계 역시 도구적이다.

인간 상호관계도 마찬가지로 소외되어 있다. 마치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인 것 같다. 이런 도구화와 소외가 가장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곳은 자아와의 관계다. 인간은 상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팔면서 스스로를 상품으로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육체의 힘을 팔고, 상인, 의사,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인격을 판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기 위해 사람은 제 직업을 하나의 인격으로 소유한다. 그리고 그 인격에는 상냥함, 친절, 솔선수범과 그밖에 그가 속한 직업과 위치가 요구하는 것들을 구비해야 한다.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인간의 속성이 가진 가치는 시장이 결정한다. 그 속성의 존재까지도 시장이 결정한다. 한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속성에 대한 수요가 없을 경우, 그 속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사용가치가 있다고 해도 무가치한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개인이 갖는 자신감’, ‘자존감역시 타인들이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암시에 불과하다. 시장에서의 수요가 있는 경우 그는 누군가이지만 인기(수요)가 없으면 아무도아니다. 이렇듯 인격의 성공 여부에 자존감이 달려 있으므로 현대인에게 인기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개인의 무의미성은 고객으로서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다. 과거의 고객은 한 명 한 명이 이름과 개성을 가진 소중한 존재로 취급되었지만 현대의 고객은 수많은 고객 중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나마 갖게 되는 최소한의 가치도 그가 소비할 수 있는 소비능력에 비례한다.

 

이런 상황을 조장하고 심화시키는 것이 현대의 광고이다. 오늘날의 광고는 광고되는 상품을 소비하거나 소유함으로써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광고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백일몽을 자극하면서 일정한 만족을 주지만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환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을 주어 더욱 깊은 무력감에 빠뜨린다.

 

이런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아닌 생각, 자기 결정이 아닌 결정을 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라는 착각을 한다. 착각을 넘어 이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자발적이라는 생각이 이런 상황을 만드는 환경, 조건을 제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고가 자기 생각의 결과, 즉 자기 행동의 결과인가 하는 점이다. 사고의 내용이 옳은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타인의 생각과 의견을 자신의 생각과 의견인 냥 믿고 주장할 때 그것의 근거로 우리는 여러 가지 합리화(비합리적인 합리화)를 한다. 이런 합리화의 비합리성은 그것이 스스로 유발했다고 착각하는 행동의 실제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가 아닌가의 여부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를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기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자신의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생각은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 생각을 한 사람이 외부 세계나 자기 자신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 자신의 생각을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합리화의 본질에는 이런 발견과 폭로가 없다. 합리화는 그저 우리의 감정적 선입견을 확인할 뿐이다. 합리화는 그저 자신의 소망과 기존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사후의 노력에 불과하다.

 

사고와 마찬가지로 감정도 가짜 감정을 경계해야 한다. 상황, 관계, 위치 등에 따라 우리는 본래의 감정을 숨기고 가짜 감정으로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가짜 감정으로 살아가는 일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삶에서 참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결국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사고와 감정에 해당되는 사항은 의지에도 해당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결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외부의 힘이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확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는 큰 착각이다. 우리가 결심하는 것의 대다수는 실제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암시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결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 이유는 고립이 두렵기 때문이며 우리의 삶, 우리의 자유와 안락이 직접적인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원래의 사고, 감정, 의지의 행위가 가짜 행위로 대체되면 결국 가짜 자아가 원래의 자아를 대체하게 된다. 원래의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의 진짜 장본인이다. 가짜 자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자아의 이름으로 연기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 억압당한 자아는 꿈에서, 상상에서, 취한 상태에서 살짝 나타나기도 한다. 오랫동안 억눌렀던 감정이나 생각이 문득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나는 이 관계를 마케팅 지향이라 불렀다. 이런 방식으로라면 인간은 자신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배치된 사물로 느낀다. 스스로를 행위의 장본인, 인간의 힘을 가진 자로 느끼지 못한다. 그의 목표는 시장에서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의 자존감은 사랑하고 생각하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자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역할에서 나온다. 마치 사물의 정체성이 세상에서 불리는 이름(쓰임에 따른)이듯 인간은 자신의 사회적 포지션(회사원, 아빠, 엄마, 학생, 유부남, 유부녀, 청소부, 경비 등)으로 자신을 느낀다. 이는 스스로를 사랑과 공포와 확신과 의혹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진정한 본성에서 소외된 추상으로서 느끼는 방식이다.

 

판매하려고 내놓은 인격은 가장 원시적인 문화에서조차 인간의 특징으로 꼽히던 존엄성의 상당 부분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스스로 소외된 인간은 자아감 전체를, 즉 스스로가 되풀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느낌을 거의 상실할 수밖에 없다. 자아감은 스스로를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감정, 나의 결정, 나의 판단, 나의 행위의 주체로 느끼는 데에서 탄생한다. 그러자면 나의 경험은 실제로 나 자신의 체험이 되어야지 소외된 체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물은 자아가 없다. 사물이 되어버린 인간은 자아를 소유할 수 없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선생님, 인생이 무기력합니다.”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공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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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금처럼 물질세계의 주인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현대인은 스스로 창조한 이 가장 우수하고 가장 멋진 사물들의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위협받고 있다. 사물이 완성되면 인간은 그 사물의 주인이 아니라 시종이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물질세계 전체가 인간 삶의 방향과 속도를 지정하는 거대한 괴물이 된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인간의 손으로 탄생시킨 작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세계가 되고, 현대인은 그 세계에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한다.

 

현대인은 본질적으로 무력감을 인식하지 못하며, 순수한 서술적, 심리학적 방법론으로도 그 무력감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무력감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 정신분석의 관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 무력감은 신경증 환자에게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증상이다. 증상 신경증이건 성격 신경증이건 모든 신경증의 중요한 특징은 한 사람이 특정한 기능을 하지 못하며, 마땅히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이런 무능력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약하고 무력하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무력감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공기와 같다..

무력감의 대상은 다양하지만 일차적으로 인간이 그 대상이다. 자신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확신이 존재한다. 타인에게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들에 대해 진지하게 거론했다는 말을 듣거나 그들의 의견을 그저 언급했다는 말만 들어도 매우 놀란다. 혹은 반대로 평소 공격적인 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역시 놀란다. 그들의 실제 능력은 그것(타인의 평가)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극심한 무력증을 호소하는 신경증 환자 중에는 대단한 명성을 누리는 인물들도 흔하다.

 

무력감은 사람들과의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해야 할 노력이 있다는 것조차 잊게 만든다. 그리하여 무력감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 맺기에 실패를 거듭하고 결국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호의를 얻는데 필요한 특성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과 과대망상과 자신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기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자아를 가지게 된다.

 

무력감의 또 다른 중요한 결과는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신체적 방어를 못하는 무능력보다 온갖 다른 종류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훨씬 더 심각하다. 부당하건 정당하건 자신을 향한 모든 비난, 비판을 그냥 감수하고 반론을 펼치지 못한다. 때로 그런 일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 때도 있지만 방어를 위한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부당하게 비난, 비판당한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 없고, 모든 비난, 비판을 정당하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심지어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무력감은 사물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익숙하지 않은 모든 상황에서 완전히 속수무책의 기분이 되는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현기증도 무력감에 뿌리를 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무력감은 자신에 대한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개인에게 미치는 가장 중요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런 차원의 무력감의 형태 중 하나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두려움에 맞서지 못하는 태도다. 충동과 두려움을 제어하려는 시도라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 이들은 난 원래 그래.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같은 모토를 품고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끝없이 한탄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인생을 보내거나 반대로 자신을 바꿔줄 무언가(종교, 철학이나 사상, 혹은 상담사 등)를 끝없이 찾아다닌다. 그러나 이 모든 부지런한 행동과 의도적 노력은 그저 깊은 무력감에 빠진 자신을 은폐하기 위한 우산에 불과하다. 이런 감정이 진전되면 그 어떤 것도 바라거나 원하지 않게 되는, 혹은 자신이 애당초 무엇을 원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에 이른다.

 

감정의 괴로움을 극복하려는 일차적 시도는 무력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련의 합리화이다. 이런 합리화에는 첫째, 자신의 무기력한 이유가 신체적 결함 탓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심리적 이유에서 나온 무력감을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고 원칙적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신체적 결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합리화는 특정한 인생 경험으로 인해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기에 모든 활력과 용기를 빼앗겼다는 확신이다. 어린 시절의 특정한 경험, 불행한 사랑, 경제적 파탄, 친구에 대한 실망을 무력감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특히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는 상상으로 혹은 실제로도 자꾸만 문제를 만들어서 절망적인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속수무책의 심정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성향이다. 눈앞에 닥친 문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무력감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적절한 항복처럼 보일 때까지 너무나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을 마구 지어낸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이런 성향은 상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까지 확장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당사자는 상상 속의 일들을 현실에서 실현시킨다. 정말로 몸이 아프고, 정말로 해고를 당하고, 정말로 부부싸움을 벌여 집안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때문에 자신의 무력감은 타당하며, 지극히 정당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자신의 무력감을 변호하는 이런 합리화는 상상이나 현실에서 자신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요인 중 하나이다.

 

또 다른 합리화군들은 앞의 경우보다 무력감을 덜 의식할 때 나타난다. 이런 종류의 합리화는 정당화의 성격보다 위로의 성격을 띠고 자신의 무기력이 일시적일 뿐이라는 희망을 일깨우는데 기여한다. 이런 위로의 합리화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형태는 기적에 대한 믿음과 시간에 대한 믿음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외부에서 온 어떤 사건으로 인해 갑자기 자신의 무기력이 사라지고 성공, 능력, 권력, 행복에 대한 모든 소망을 이룰 것이라는 상상이다.

 

시간에 대한 믿음에서는 갑작스러운 변화(변화의 돌연성)’라는 요소가 부재한다. 그 대신 시간이 가면서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이루고 싶었던 일을 전혀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그럴 준비조차 못했다는 사실을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말로 위로한다.

 

무력감을 희미하게 의식은 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뾰족한 가시가 무뎌지는 경우, 무력감을 억압하는 반응이 나타난다. 이 경우 무력감은 과보상 행동과 은혜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경우는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은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무기력한 인간의 정반대라고 생각할 정도로 분주하다. ‘과도한 단체 활동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쉼 없는 걱정, 게임이나 단골 술집에서 장시간 환담을 나누는 것 또한 다른 형태의 가짜 활력이다. 가짜 활력과 가짜 분주함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비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것들에게까지 확장되며, 정작 해결해야 할 과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무력감에 대한 보다 더 과격한 반응으로는 상황을 가리지 않는 통제와 지휘의 노력을 꼽을 수 있다. 많은 경우 이런 소망은 순수하게 상상에 국한된다. 이런 사람의 경우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리라는 기대감을 가끔씩 인식할 것이고, 이런 기대마저 억압당하면 사람들을 만날 때 분노의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 분노 반응마저 억압되면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게 약간의 거부감과 수줍음을 보이는 것 말고는 전혀 눈에 띄는 점이 없다. 하지만 이런 과대망상은 그 정교함이나 의식의 여부와 관계없이 빈도와 강도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특히 중산층과 지식인에게서 그렇다.

 

다른 억압이 그렇듯 무력감 역시 억압하면 의식에서 감정이 제거되기는 하지만 특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무력감의 종류는 무력감의 의식 여부에 달려 있지만 무력감의 강도는 본질적으로 강렬함과 연관이 있다. 무력감이 불러오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일반적인 결과는 분노다. 특징적인 무기력이 나타나는 분노다. 이런 분노의 목적은 다른 종류의 분노처럼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분노는 훨씬 더 모호하고 불분명하지만 훨씬 더 파괴적으로 외부 세계와 자신의 자아를 공격한다. 그 어떤 명령도 따르기 싫어하고 사사건건 반대를 하며 매사 불만인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분노의 결과는 항상 공포다. 분노가 억압될수록 공포도 커진다.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투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분노를 확실히 억압하기 위해 내가 남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나한테 화가 났다라고 표현될 법한 감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증오와 박해를 받는다는 느낌이며, 그 결과 공포를 느낀다. 분노의 억압을 에두르는 이런 간접적 방법 외에 무력감에서 직접 나오는 공포도 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고 특히 타인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공포를 탄생시킨다. 무력감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다시 무력감을 강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무기력을 호소하는 환자의 유형은 대개 둘로 나뉜다. 다양한 이유들(이미 나이가 너무 많다. 신경증은 가족내력이다, 치료를 받을 시간이 없다 등)을 핑계로 결국 그래서 자신은 변할 수 없다고 되풀이하는 부류와 일정한 낙관론과 긍정적 기대를 품고 의사가 정신분석을 통해 반드시 그에게 결정적인 일을 해줄 것이며, 본인은 수동적으로 그 과정을 참고 견딜 수 있다고 기대하는 부류.. 그러나 후자 역시 실제로는 그 어떤 변화도 믿지 않지만, 위안의 합리화로 자신의 불신을 은폐할 뿐이다.

 

무력감처럼 깊이 자리 잡은 강렬한 감정은 아주 어린 시절의 체험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 사회는 아이가 아직 아이라는 이유로 노인이나 장애인처럼 무시한다. 혹은 반대로 너무 예뻐하고 응석받이로 키우면서 아이를 무능력자로 만든다. 부모의 친절이 모든 원칙적 반항심의 발전을 가로막아 아이를 점점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아이는 자신의 권한으로는 아무것도 지시하거나 이룰 수 없으며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고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얌전하게 말을 잘 들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만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어른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이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특정한 질문에 진지하게 응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대답하는 것 역시 아이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어른들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오직 어른이 존중하는 다른 어른을 대하듯 아이에게도 똑같이 책임감을 느끼고 성실하고 신뢰를 느끼게 행동할 때에만 아이도 진지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낀다.

(아이의 상황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장난감 전화기이다. 진짜 전화기처럼 버튼을 누르지만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는다. 아이는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다. 어른과 똑같이 행동했음에도 아이의 행위는 그 어떤 결과도, 어떤 영향력도 없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능력에 바탕을 두고 평가한다. 어떤 사람에게 돌아가는 존중의 정도는 그의 경제적 생산력의 정도에 좌우된다. 경제적으로 어떤 잠재력도 없는 사람은 결국 인간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다. 노인과 장애인과 아이를 대하는 이 사회의 태도가 바로 그러하다. 냉혹한 무시보다 과도한 친절과 도움에 이르는 모든 감정의 수위가 또한 바로 그러하다.

 

아이의 무력감이 탄생하는 조건은 더 높은 차원인 어른의 삶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다만 어른의 경우엔 그 무시의 방법이 보다 교묘하다. 반대로 어른은 스스로 진정 원하고 노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며, 성공과 실패도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는 말을 듣는다. 삶은 우연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 자신의 근면, 자신의 에너지가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거대한 게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는 실제 상황과 절대적으로 대립된다. 우리 사회의 성인들은 사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그리고 자신이 약한 것이 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믿게 될수록 무기력이 더욱 심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현대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전혀 없다. 그가 어떤 능력을 갖출 수 있는지를 출생이 우연히 결정한다. 일자리를 구할 수는 있을지, 구한다면 어떤 직업을 택할 수 있을지도 본질적으로 그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는 요인들이 결정한다. 심지어 자신의 파트너 역시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경계(한계)의 제약을 받는다.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자신의 사고, 경험, 결정의 모든 순간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좌절과 절망을 반복할 수밖에 없고 결국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 및 사회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올바르게 통찰하는 것이다. 무지와 인식의 결핍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무력감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온갖 망상을 총동원하여 절망적으로 저항해 봤자

개인은 결국 내면적으로 그 무기력을 인식하게 된다. 올바른 사회 이론, 개인에게 적용할 올바른 심리학 이론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무력감의 중요한 원인이다. 삶을 이해하고 통찰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이 필요하다. :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삶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통찰해야 한다.

 

 

0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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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믿을 수 있는 진짜와 순수 허울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을 믿지만 그것은 이미 미친 사람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혼동이다.

 

우리가 장미를 보고 이것은 장미다혹은 나는 장미를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장미를 본 것일까? 우리가 장미를 보면서 그것을 장미라는 개념으로 인식할 때 대개 우리는 우리 눈에 비치는 개체로서의 장미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 인지적 이해와 그것의 언어화 (장미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기억, 추억 등)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장미를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자신이 말을 배웠다는 사실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행위는 실제로 보는 행위가 아니라 그 본질상 지적 행위이다. 그렇다면 보는 행위의 참뜻은 무엇인가?

 

진실로 본다는 경험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이다. 그것은 감탄이고, 감동이고, 재미. 이러한 을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굴러가는 공을 보는 어른과 두 살 아기의 태도는 전혀 다르다. 어른에게 굴러가는 공은 굴러가는 순간 단 한 번의 목격이면 굴러 간다는 상황 파악이 끝난다. 이것은 이성적인 인식이다. 반복할수록 지겨울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겐 굴러가는 공을 보는 일차적 이유가 재미이다. 반복할수록 즐겁고 재미있다. 이것은 테니스 경기를 보면서 어른이 느끼는 재미와 같은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를 본다고 하자. 순수한 개념적 인식으로의 나무는 개성을 갖지 않으며 그저 나무종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이때의 나무는 추상이다. 반대로 완벽한 인식의 경우에는 추상이 없다. 나무는 완벽한 구체성과 더불어 유일성을 간직한다. 그런 나무를 본다면그 순간, 나와 인연을 맺고 내가 보고 응답하는 나무는 오직 그 나무 한 그루밖에 없다. 그 나무는 바라보는 사람에게 유일하다. : 발견의 순간!

 

보통 우리가 인간을 볼 때 경험하는 것은 사물을 볼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한 개인을 기억할 때 떠오르는 그에 대한 모든 지식(이름, 나이, 외모에 대한 특징들, 사회적 지위, 교육정도, 그의 성격 등)은 우리가 장미라는 언어적 개념을 통해 떠올리는 장미의 특징들과 같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는 그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구체적인 사람에게서 추상을 본다. 그가 자신과 우리에게서 추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상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공포증이 있는데 그 공포증 때문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표면을 뚫고 핵심까지 밀고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겁을 낸다. 그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보길 원한다. 이런 피상적 친밀함은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한 우리 감정의 내적 상태에 상응한다. :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상태만 유지..

 

피상적으로 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많은 관점에서 비현실적으로 본다. 일차적 원인은 투영이다. 우리는 화가 나면 그 화를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고 그 사람이 화가 났다고 믿는다. 우리가 허영심이 있으면 상대가 허영심이 있다고 느낀다. 우리가 겁이 나면 그가 겁을 낸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실제 상대가 입지도 않은 옷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그 모습을 상대라고 믿으며 우리 눈에 비치는 그는 우리가 그에게 입힌 옷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투영만이 아니다. 왜곡하기도 한다. 우리 자신의 감정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이유 세 가지를 불교에서는 탐(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의 3독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투영과 왜곡을 낳는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완벽하게 각성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그의 온전한 현실로 보는 경험은 낯설고 놀라운 순간일 것이다. 지금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전혀 새롭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다가오는 순간인 것이다. 그 순간 상대의 모든 것이 더 강렬하고, 구체적인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렇게 우리는 본다본다의 차이를 배울 수 있다.

 

한 사람이나 사물의 전체를, 그것의 온전한 현실을 본다는 것은 현실에 꼭 들어맞는 응답을 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적인 의미에서 반응하고 응답한다는 말은 나를 아프게 하고, 기쁘게 하고,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내 모든 인간적 힘을 총동원하여 응답한다는 의미이다. 그럴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게 반응한다. 타인에 대한 나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나의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나 눈이나 귀로 응답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내 온 인격으로 응답한다. 내 온몸으로 생각하고 내 가슴으로 본다. 어떤 대상에게 내 안에 존재하는 실제의 힘으로, 그야말로 응답의 능력을 가진 온 힘으로 응답하다면 그 대상을 대상이기를 멈춘다.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게 된다. 나는 그것의 재판관이 아니다. 이런 식의 응답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되는 완벽한 관계의 상황에서 가능하다.

 

이렇게 보고 응답하고 인식하고 인식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을 갖추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한 번 본 것을 자신의 인식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볼 때마다 유일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보고 느끼는 속에서 우리는 감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진정으로 집중을 할 때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사람과 이야기를 하건, 글을 읽건, 산책을 하건 이 모든 것에만 집중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 살고 있다. 과거의 상처와 미련과 후회에,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도한 기대에 삶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Now, Here) 그러므로 진정한 인식과 응답은 여기 지금에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하고, 보고, 느끼는 것에 전념한다면 말이다.

 

가 하고 느끼는 것과 관련하여서는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자아 경험의 능력은 진짜 삶의 또 한 가지 조건이다. ‘는 아이가 마지막으로 배우는 단어 중 하나지만 일단 배우고 나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된다. ‘나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혹은 저것을 믿는다등등. 그러나 이때 생각하고 믿는 것인 정말 의 것일까? 이것은 마치 레코드플레이어가 모차르트의 앨범을 틀면서 나는 지금 모차르트의 심포니를 연주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감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이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Origin)을 두는 경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감정, 즉 정체감이 필요하다. 자아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미치고 말 것이다. 정체감은 우리가 사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원시 사회에서의 자기감정은 나는 우리라는 말로 대변된다. 나와 집단은 일체였다. 그러나 진화의 과정에 따라 인류는 스스로를 집단의 일원이 아닌 분리된 개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독립된 개체인 그는 이제 스스로를 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 ‘자아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오해도 크다. 일부의 학자들은 이 감정을 자신에게 할당된 사회적 역할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본다. 타인의 기대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자아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짙은 불안과 공포, 강박적인 순응의 욕망을 초래하는 병리학적 현상이다. 이런 공포와 순응의 강박은 나 자신을 창의적인 내 행위의 장본인으로 느끼는 자아감정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나는 나를 타인과의 관계의 과정에서만 로 느낄 수 있다. : 세상과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치는 를 통해서만 나의 자아를 인식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거울이 더렵혀지거나 일그러지거나 깨어져 버리면 그 인식도 같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 왜곡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더욱더 사회순응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그 결과는 본래의 자신에게서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타인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에는 나의 정체성과 나의 자아라는 감정을 전혀 키울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때 나는 정체감이 아닌 내 인격을 소유한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 나는 나의 소유물이 된다. 나의 지식, 신체, 기억을 포함하여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자아의 경험이 아니다. 이때 느끼는 자아란 사물로서의, 소유물로서의 나의 인격(사회적 인격)에 집착하는 자아이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포로다. 감금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하고 공포에 사로잡힌 포로다. (사회적 인격의 추락, 실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듯)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 사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 응답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을 경험하도록 배워야 한다. 여기서의 역설은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기 인격의 경계를 초월하며, ‘나다라고 느끼는 순간, ‘나는 너다’ ‘나는 온 세상과 하나다라고도 느끼게 된다. : 달걀은 알을 깨고 나와야 병아리가 되고 닭이 될 수 있다!

 

또 한 가지(진짜 삶의)의 조건은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런 생각은 갈등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된다. 현대인들은 갈등이란 해로운 것이기에 가능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개발하는 원천이다. 갈등을 피하면 인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 개인적이고 우연한 갈등도 있지만 인간 실존에 깊이 뿌리내린 갈등도 존재한다. 실존의 갈등이란 우리가 우리 몸을 통해, 그 몸의 욕망과 욕망의 최종적인 말살을 통해 동물에 왕국에 소속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의식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통해, 이 동물의 왕국과 본성을 초월하는 사실 탓에 생겨나는 갈등이다.

우리가 외면하고자 하는 것은 갈등만이 아니다. 우리는 갈등뿐 아니라 양극성도 부인하려 한다. 다양한 양극성이 존재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기질의 양극성이 있겠고, 사회적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양극성은 남성과 여성이다. 성적매력은 남성의 극과 여성의 극이 형성하는 우주적 양극성에서 샘솟는다. 그러나 현대는 남성과 여성의 양극성마저 평준화라는 이름으로 축소시켜버리고 있다. 평등에 대한 왜곡(차이를 말살시켜 모두가 같게 만드는 것을 평등이라고 부름)이 양극성을 부인하게 하고, 나아가 우리의 개성을 말살시킨다. 차이가 평등의 원칙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공포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 다름은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풍요로움의 기본이다.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 인간은 인간 고유의 이분(二分)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안전을 의미하는 과거 상태의 포기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게, 더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이리저리 오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태어날 준비-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또한 자신의 사고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관련하여서도 진리 말고는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용기이다. 그리고 이런 용기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여기서의 믿음은 단순히 믿다의 의미가 아니다. 구약에서 믿음을 칭하는 단어 에무나(emuna)’가 확신을 뜻하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사고와 감정에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